기본소득제도의 어디가 이상한지 생각하다가에 이어서.
위는 일전에 갈매기님의 기본소득 논설 비판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를 적었던 글이다. 그 때는 갈매기님이 경제학 전공자인것 같아 용어의 지적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이준구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를 대충 보다보니 낯익은 표현이 나오더라.
참고로 공급중시 경제학과 공급중심 경제학은 둘 다 Supply-side Economics로서 같은 용어의 번역어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갈매기님은 우선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공급중심 경제학"에 대해서 전공자도 모르는 괴상한 용어라고 일갈한 데 이어 "...라는 건 학문적 용어이지... 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공급중심 경제학이란 용어의 학문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용법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금민이 사용한 "공급중심 경제학"이 경제학의 정의와 부합하지 않게 쓰였다고 볼만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저 글에서 금민이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이라는 수식어구를 통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공급중심 경제학"이란 용어의 정의가 아니라 공급중심 경제학이 초래할 사회경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감세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세원 확대가 가능함을 주장하는 래퍼곡선이 기반을 둔 공급중심 경제학적 정책은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게 만든다"는 것이 금민의 의도일 것이다. 실제로 현 정권은 공급중심 경제학을 바탕으로 감세정책을 펴고 있으며,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므로, 둘의 인과관계 여부를 규명하는 것이 초점이 되어야지 문맥상의 쓰임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같다.
또 하나.
갈매기님은 "...수요중심경제학은 또 무엇인가" 라고 하셨는데, 이후 "공급중심 경제학은 학문적 용어"라고 하셨으나 "수요중심 경제학"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으므로 내가 읽기에 이는 "경제학용어에 공급중심 경제학이라 정의된 용어는 있으나 수요중심경제학이라 정의된 용어는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Supply-Side, Demand-Side 라는 키워드로 구글에서 검색을 했더니 칼럼이 나오더라. Robert Freeman이라는 별로 안 유명할 것 같은 사람이 진보운동단체 홈페이지에 기고한 A Tale of Two Theories: Supply Side and Demand Side Economics(원문)라는 글이다.
몇 주 전에 되도 않는 독해력으로 전문을 번역해 봤는데 제법 길고 매끄럽지 못하니 안 볼 사람만 열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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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솜씨의 번역을 안 보셔도 되도록 내용을 요약하면, 레이건→부시→클린턴→부시 행정부로 이어지는 미국 역사를 통해 공급중시 경제학은 빈자를 쥐어짜서 부자를 살찌우며 전체적인 경제수준의 후퇴를 초래하는 병신짓거리라는 것이 이미 증명된 사실이란다.
그리고 수요중시 경제학은 거의 정확하게 공급중시 경제학에 대한 반대 성격을 띤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수요중시 경제학이 일반론적인 세제균형과 경제정책에 관련된 입장을 아우르는 것이며, 공급중시 경제학이 수요중시 경제학의 "상식"과 상반되는 사이비 이론이다.
이상을 통해 결론하면, 금민이 기본소득 논설에서 거론한 공급중심 경제학과 수요중심 경제학이란 용어는 적어도 학문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뜻으로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덧. ...이미 다 나왔지만 사실 수요중심경제학은 Demand-Side Economics의 번역어로서, 비즈니스사전 따위에서 찾아보면 케인즈주의경제학의 대체용어 쯤으로 소개된다. 다른 기본소득관련 논설 등을 찾아보면 모든 수요중심경제학이 케인즈주의인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덧둘. 공급중시, 공급중심이 supply-side의 번역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요중시, 수요중심은 demand-side의 번역어로 간주하여 엄밀히 구분하지는 않았음. 단, 직접 번역한 글에서는 모두 "-중시"로 썼고 금민의 기본소득논설 부분만 "-중심"이라고 원래대로 놔 두었음. 수요중시 대신 케인즈주의라고 쓰는 글에서는 공급중시를 공급주의라고 쓰는 것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데, 번역어 자체가 중구난방이라 더는 말 않겠음.
뜬금없이 세계 밸리.
위는 일전에 갈매기님의 기본소득 논설 비판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하는 바를 적었던 글이다. 그 때는 갈매기님이 경제학 전공자인것 같아 용어의 지적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이준구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를 대충 보다보니 낯익은 표현이 나오더라.
...(전략) 래퍼곡선이라고 하는 이 그림은 세율을 내리면 조세수입이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율 인하가 경제를 활성화해 세원을 더 크게 만들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줄기차게 감세를 부르짖어오던 레이건으로서는 천군만마의 힘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아 그래, 공급중시 경제학이다. 이준구교수는 적어도 이 글에서는 공급중시 경제학이란 용어를 (부자)감세를 통해 경제가 활성화하면 감세분을 충당하고도 남는 세원확대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사이비 이론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레이거노믹스가 거품이었던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래퍼곡선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그리고 래퍼곡선이 기반을 두고 있는 이른바 공급중시 경제학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경제학 교과서 어느 것을 펴보아도 공급중시 경제학을 진지하게 다룬 사례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시류를 타고 한때 반짝한 사이비 이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후략)181p, "사이비 이론의 화려한 부활"
참고로 공급중시 경제학과 공급중심 경제학은 둘 다 Supply-side Economics로서 같은 용어의 번역어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서.
기본소득은 분명 사회적 필요노동을 임금노동과 동일화할 수 없음을 표현한다. 그런데 경제위기상황에서 이는 정말 한가한 공상이 아닐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위기에 대한 대안 중에 기본소득만한 대안도 없다. 위기 극복을위해서는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공급중심 경제학으로부터 수요중심 경제학으로 전환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임금노동사회로부터 벗어날 것을 주문한다. 그럼에도 고용창출 측면에서도 기본소득만한 대안도 없다. 세계경제가 위기라면 저소득층의 구매력을높이고 내수를 창출해야 한다. 수요는 공급을 만들고 고용도 창출한다. ...(후략)금민의 기본소득 - 두 가지 무조건성에 대하여 중
->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공급중심 경제학"은 또 무엇이고 "수요중심 경제학"은 또 무엇인가. 제발 전공자도 모르는 괴상한 용어좀 만들어내지 말아달라. 공급중심 경제학이라는 건 학문적 용어이지, 무슨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뜻으로 쓰라고 만든 표현이 아니다. ...(후략)갈매기님의 금민의 기본소득 논설 비판 중
갈매기님은 우선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공급중심 경제학"에 대해서 전공자도 모르는 괴상한 용어라고 일갈한 데 이어 "...라는 건 학문적 용어이지... 이 아니다"라는 말씀을 통해 공급중심 경제학이란 용어의 학문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용법을 지적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는 금민이 사용한 "공급중심 경제학"이 경제학의 정의와 부합하지 않게 쓰였다고 볼만한 이유는 없어 보인다. 저 글에서 금민이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는" 이라는 수식어구를 통해 이야기하려던 것은, "공급중심 경제학"이란 용어의 정의가 아니라 공급중심 경제학이 초래할 사회경제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감세를 통해 경제 활성화와 세원 확대가 가능함을 주장하는 래퍼곡선이 기반을 둔 공급중심 경제학적 정책은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을 끊임없이 삭감하게 만든다"는 것이 금민의 의도일 것이다. 실제로 현 정권은 공급중심 경제학을 바탕으로 감세정책을 펴고 있으며, 임금과 임금부대비용이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므로, 둘의 인과관계 여부를 규명하는 것이 초점이 되어야지 문맥상의 쓰임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같다.
또 하나.
갈매기님은 "...수요중심경제학은 또 무엇인가" 라고 하셨는데, 이후 "공급중심 경제학은 학문적 용어"라고 하셨으나 "수요중심 경제학"에 대한 언급은 따로 없으므로 내가 읽기에 이는 "경제학용어에 공급중심 경제학이라 정의된 용어는 있으나 수요중심경제학이라 정의된 용어는 없다"는 것처럼 보인다.
Supply-Side, Demand-Side 라는 키워드로 구글에서 검색을 했더니 칼럼이 나오더라. Robert Freeman이라는 별로 안 유명할 것 같은 사람이 진보운동단체 홈페이지에 기고한 A Tale of Two Theories: Supply Side and Demand Side Economics(원문)라는 글이다.
몇 주 전에 되도 않는 독해력으로 전문을 번역해 봤는데 제법 길고 매끄럽지 못하니 안 볼 사람만 열어 보기 바란다(?).
보기
더러운 솜씨의 번역을 안 보셔도 되도록 내용을 요약하면, 레이건→부시→클린턴→부시 행정부로 이어지는 미국 역사를 통해 공급중시 경제학은 빈자를 쥐어짜서 부자를 살찌우며 전체적인 경제수준의 후퇴를 초래하는 병신짓거리라는 것이 이미 증명된 사실이란다.
그리고 수요중시 경제학은 거의 정확하게 공급중시 경제학에 대한 반대 성격을 띤다. 아니, 제대로 말하자면 수요중시 경제학이 일반론적인 세제균형과 경제정책에 관련된 입장을 아우르는 것이며, 공급중시 경제학이 수요중시 경제학의 "상식"과 상반되는 사이비 이론이다.
이상을 통해 결론하면, 금민이 기본소득 논설에서 거론한 공급중심 경제학과 수요중심 경제학이란 용어는 적어도 학문적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어디서 듣도보도 못한 뜻으로 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덧. ...이미 다 나왔지만 사실 수요중심경제학은 Demand-Side Economics의 번역어로서, 비즈니스사전 따위에서 찾아보면 케인즈주의경제학의 대체용어 쯤으로 소개된다. 다른 기본소득관련 논설 등을 찾아보면 모든 수요중심경제학이 케인즈주의인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동일하다고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덧둘. 공급중시, 공급중심이 supply-side의 번역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수요중시, 수요중심은 demand-side의 번역어로 간주하여 엄밀히 구분하지는 않았음. 단, 직접 번역한 글에서는 모두 "-중시"로 썼고 금민의 기본소득논설 부분만 "-중심"이라고 원래대로 놔 두었음. 수요중시 대신 케인즈주의라고 쓰는 글에서는 공급중시를 공급주의라고 쓰는 것을 선호하는 듯 보이는데, 번역어 자체가 중구난방이라 더는 말 않겠음.
뜬금없이 세계 밸리.




덧글
그런데 사실 금민이 '공급중심 경제학'을 그런 뜻으로 썼는지는 좀 의문입니다. 임금과 임금 부대비용의 경우는 사실 케인지언 경제학에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부분에 가깝습니다.최저임금이 10% 오르면 해당 섹터의 고용이 3% 정도 구축되더라 하는 연구도 있고, 신경제 시대에 연구된 것에 의하면 그딴 거 없고 여자와 청소년에게 도움되더라 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엔 금민의 공급중심 경제학/수요중심 경제학은 전통적인 자본가/노동자를 재화 공급/재화 수요에 대입해서 즉석에서 만들어낸 표현에 가까워 보입니다. 정론적인 의미로 썼다면 좀 다른 이야기가 나와야겠죠.
저도 수요중심경제학은 말씀하신대로 공급중심경제학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는 되더군요. 아무래도 이건 비전공자를 위한 떡밥성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치적인 주장을 할 때 학문적인 "정밀함"이나 "그 바닥에 적절한 표현"을 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보이니까요.
요는 경제학이라는 학문 안에 수요중심경제학이라는 표현이 "필요없다"더라도 어떤 정치적 주장상 써먹을 수는 있지않나 생각합니다. 용법이 야매인지는 그 다음 문제...지만 이미 두번째 단락에 언급하셨군요.
저는 금민이 공급중심경제학을 통해 파생되는 현상을 언급함으로써 용어의 바운더리를 과장한 것 정도로 생각했죠. 경기변동과 자본·노동의 수요·공급을 결부시키는 것이 제 딴에 어색한 점은 느껴지지 않았으니. 으으 교양수준의 경제학개론이라도 공부할 걸.
이 모든 기획은 많든 적든 Rawls의 '정의론'에 등장하는 정의로운 평등의 원칙, 특히 차등원칙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어떤 철학적 입장에서 보다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기획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해보는 과정에 제안된 것들이라는 이야기지요. 바꾸어 말하면 이런 제안들은 실질적인 정책대안이라기 보다는 철학자들의 사고 훈련을 위한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 말씀은 "철학자들의 사고훈련"과 "실질적인 정책 대안"이 상보적이지 않거니와 배타적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정책적 대안은 철학이나 가치를 바탕에 두고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철학적 사고훈련으로 파생되는 것들은 원래 실현가능성을 고려할 때 부질없는 것이란 정도의 의미로 하신 말씀이신지.
자동차에 안전벨트 설치와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은 교통사고시 탑승자를 보호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입니다. 그런데 경제학자 Samuel Peltzman이 교통사고 통계를 분석해 본 결과 역설적인 결과를 발견합니다. 그의 조사에 따르면 사고당 사망률은 감소했지만 사고발생률은 오히려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운전자 사망률은 제자리인데, 보행자 사망률은 커진 결과를 보입니다. 펠츠만은 안전벨트로 인해 운전자가 보다 안전해진만큼 안전운전을 덜 해도 되는 유인이 발생해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여기까지는 정통적인 경제학적 분석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제안이 등장합니다. "차라리 운전대 한복판에 커다란 대못을 박자"
그러면 안전벨트와는 반대로 운전자가 그걸 보면서 늘 두려움을 느낄 것이고 보다 안전운전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고가 나면 제일 먼저 죽을테니 당사자 책임 원칙에도 충실하다. 그 결과 보행자 사망 가능성이 도로 줄어든다면 공공선이 증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인센티브'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사고훈련"으로는 훌륭합니다. 사실 '운전대 한복판에 대못박기'는 경제학 교수들이 학생들을 경제학자처럼 사고하는 법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잘 드는 예입니다. 토론수업의 좋은 소재이지요. 하지만 이런 것을 실질적 정책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전대 한복판에 대못박기'는 대중들이 대부분 경제학자처럼 생각할 경우라면 실질적인 정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서 언급한 일련의 철학자들의 제안 또한 대중의 주류가 그 철학자들처럼 생각한다면 실질적인 정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둘은 모두 같은 이유로 비현실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지요.